* 유럽 진출 경험담 인터뷰(이재웅)를 바탕으로 작성
자기 소개
2008년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연구자로서의 삶은 끊임없는 도전과 배움의 연속이었다. MEMS 재료 연구를 시작으로 MEMS 설계 및 공정기술, 반도체 제조공정, 실리콘 포토닉스(Silicon Photonics), 3D 집적 및 첨단 패키징 기술, 그리고 최근의 양자 센싱(Quantum Sensing)에 이르기까지 연구 분야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며 미국, 일본, 싱가포르, 핀란드에서 다양한 연구 경험을 쌓아왔다. 각 국가의 연구 문화와 산업 생태계는 서로 달랐지만, 첨단 기술을 통해 미래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연구자로서의 열정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현재는 핀란드 최대의 응용연구기관인 VTT Technical Research Centre of Finland에서 선임연구원(Senior Scientist)으로 재직하며 차세대 반도체, 포토닉스, 센서 융합기술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연구 활동과 더불어 핀란드 한인과학기술자협회 회장, 한-유럽 양자과학기술협력센터(Korea-Europe Quantum Science and Technology Cooperation Center, K-E QSTCC) 자문의원, 그리고 유럽 한인과학기술자 총연합회(K-TAG) 활동에 참여하며 국제 과학기술 협력과 연구자 네트워크 구축에도 기여해 왔다. 돌이켜보면 나의 연구 여정은 단순한 연구 성과를 넘어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해 온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경험들은 오늘날 연구자로서의 시야와 역량을 형성하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핀란드과협 협회장시 문제인 전 대통령님 방문
여러 나라를 거쳐 핀란드로
미국으로
30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해외에서의 연구 생활은 막연한 꿈에 가까웠다. 서울대학교 재료공학과 박사과정 말미, 논문 자격시험과 프로포절 심사를 마치고 최종 디펜스만 남겨둔 시점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교(Georgia Tech)에서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나는 연료전지(Fuel Cell)를 연구하는 연구실에서 1년 동안 연구를 수행했다. 미국에서의 생활과 연구 경험은 연구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연구 시스템, 교수와 학생의 관계, 연구실 운영 방식 등 많은 부분이 한국과 달랐다. 특히 자유로운 토론 문화와 연구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환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한 여러 교수들과의 미팅을 통해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연구를 이어갈지에 대한 방향도 조금씩 구체화할 수 있었다.
비록 조지아텍에 남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이후 연구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미국 생활은 연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으로 가득했다. 허리케인을 직접 겪었고, 밤중에 들리는 총소리에도 놀랐으며, 우연히 경찰의 범인 체포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연구실 밖의 미국 사회를 경험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역시 한층 넓어졌다.
조지아텍에서 셋팅한 진공 장비 앞에서 중국 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박사학위를 마친 후, 내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미국 조지아텍의 MEMS 연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 도호쿠대학교(Tohoku University)의 MEMS 연구실이었다. 두 연구실 모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교수진과 뛰어난 연구 성과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나는 일본행을 선택했다. 당시 일본은 MEMS와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장비와 연구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으며, 실험 중심의 연구를 더욱 깊이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가깝지만 여러 면에서 다른 일본 생활은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일본 연구실에서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실험을 짧은 기간 동안 수행할 수 있었다. 반도체 공정, MEMS 설계 및 제작, 패키징 기술 등 폭넓은 기술을 경험하면서 연구자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실제 장비를 활용한 반복 실험과 문제 해결 과정을 통해 연구 역량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에사시 연구팀과 프라운호퍼 팀과 신년 행사
참고로 센다이에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고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었다.
싱가포르로
4년간의 일본 연구 생활을 마친 후 다시 한번 새로운 선택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싱가포르 국립 연구기관인 A*STAR와 독일의 프라운호퍼(Fraunhofer) 연구소가 나의 다음 행선지 후보였다.
두 기관 모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기관이었지만, 나는 최종적으로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연구 환경도 중요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삶 역시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어 가족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 보다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A*STAR에서의 연구 생활은 또 다른 도약의 시간이었다. 싱가포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최신 연구 장비와 풍부한 연구비가 제공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하면서 국제 공동연구의 경험도 더욱 넓어졌다.
어느덧 싱가포르에서의 연구 생활은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북유럽, 핀란드로
싱가포르에서 안정적으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향한 열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북유럽의 대표적인 국가 연구기관인 VTT(Technical Research Centre of Finland) 로부터 기회를 얻게 되었고, 나는 가족과 함께 핀란드행을 선택하게 되었다.
핀란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제도와 교육 시스템을 갖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동시에 노키아(Nokia), 알토대학교(Aalto University), VTT 등을 중심으로 첨단 기술 연구와 혁신을 선도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인구는 많지 않지만 연구개발 투자와 기술 혁신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한다.
그 중심에 있는 기관이 바로 VTT이다. 1942년에 설립된 VTT는 핀란드 최대의 응용연구기관으로, 대학의 기초연구와 산업 현장의 기술 수요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반도체, MEMS, 포토닉스, 인공지능, 양자기술, 청정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하며, 연구 결과를 논문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실제 산업과 사회 문제 해결로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VTT 소개 이미지
특히 VTT의 강점은 기업과의 긴밀한 협력에 있다. 연구 결과를 기술이전과 사업화로 연결하고, 스타트업 창업과 신산업 육성을 지원하는 등 연구가 실제 경제적 가치 창출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점은 국가 연구기관으로서의 VTT를 유럽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
핀란드 연구소 생활
핀란드에서의 연구소 생활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어느 나라와도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수평적인 조직문화와 연구자의 자율성이다.
직급이나 직책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며, 연구 방향이나 기술적 문제에 대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연구원과 팀장, 심지어 연구소의 고위 경영진과도 비교적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높은 집중력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퇴근 후에는 가족과 여가를 위한 시간을 보낸다. 여름철 장기 휴가는 자연스러운 문화이며, 충분한 휴식이 더 좋은 연구 성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국제적인 연구 환경도 큰 장점이다. 다양한 국적의 연구자들이 함께 일하며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유럽연합(EU)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 전역의 대학, 연구소, 기업과 협력할 기회도 많다. 이러한 경험은 연구자로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전문성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핀란드에서의 연구 생활 AI 이미지
무엇보다도 핀란드에서의 연구는 사회와 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연구 결과가 실제 제품과 서비스로 이어지고, 새로운 산업과 기술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다. 연구가 논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로 이어지는 것이다.
맺음말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시작된 나의 연구 여정은 미국, 일본, 싱가포르를 거쳐 이제 북유럽 핀란드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 나라는 서로 다른 연구 문화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연구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은 시야를 넓혀주었고, 일본은 연구의 깊이를 가르쳐주었으며, 싱가포르는 국제적인 연구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핀란드는 연구와 삶의 균형, 그리고 연구가 사회와 연결되는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연구자의 길은 끝없는 도전과 배움의 연속이다. 여러 나라를 거치며 얻은 경험들은 단순한 경력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앞으로도 새로운 기술과 혁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연구자로 성장해 나가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